디자인을 하다보면 오퍼레이터가 되지말고 디자이너가 되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생각없이 손만 움직이는 작업이 아닌 고민하고 디자인을 하라는 의미의 말이다. 하지만 디자이너라면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하는 주제라서 제목을 이렇게 적어봤다. 나의 경험이 들어간 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중간고사를 잘 봤던 나는 유행하던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를 선물로 받았고 나는 그 디자인에 빠져들었다. 이노 디자인의 대표인 김영세 디자이너와 함께 아이리버의 최전성기 시절이었다. 당시엔 '디자인'이라는 단어 자체도 낯선 시기. 이런게 디자인이구나 라는 걸 깨닫고, 그때부터 내 꿈은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막연하게 멋진 디자인을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 공부를 하다가 겨울방학이 되어서야 미술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처음 가본 미술학원은 설렘과 두려움의 장소였다. 생전 미술과 담을 쌓고 지내던 내가 꿈을 가지고 미술(디자인)을 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직선과 곡선 시작으로 열심히 배워갔지만, 그때도 어렴풋이 알게 된 건, 지방의 작은 미술학원인데도 이곳에 나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점. 하지만 그땐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열심히 하다보면 저기 있는 형, 누나들처럼 그림을 잘 그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깐.
2년 넘는 시간동안 정말 열심히 그림그리고 수능공부를 하며, 입시 준비를 하고 입시를 치뤘다. 여전히 내 실력은 너무 부족했지만, 정말 운좋게도 서울 소재의 대학에 있는 한 디자인과에 붙었다. 그리고 그날 난 내꿈에 크게 한발자국 다가간 것 같아 너무나 기뻤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미술학원에서 느꼈던 무언가를 여기서도 다시 한번 느꼈다. 같은 과에 디자인을 잘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역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도 4년간 다니다보면 저렇게 잘할 수 있겠지.
(첫 포폴을 만들 당시에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와서 보니 부족한 점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어느덧 군대도 다녀오고 학교 생활도 열심히 하다보니 내게도 졸업이 성큼 다가왔다. 대학을 4년 다녔지만, 내가 한 디자인은 너무 부족한데 주위 동기, 선후배들은 너무 잘하는 것 같아 기가 죽었다. 하지만 난 내 꿈을 향해 지금껏 달려왔고,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하면 더 잘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취업은 해야할 것 같은데, 실력이 부족하니 학원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년간, 아니 휴학을 포함한 5~6년간 대학 안팎에서 디자인을 배웠음에도 취업을 하기 위해 학원을 다녀야한다는 생각에 허탈했지만, 내가 부족하니깐 배운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학원을 다녔다.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학원에서 열심히 배우며 만든 포트폴리오로 여러군데 지원을 해보다가 우연히 내 포폴이 마음에 든다며 면접을 보자고 한다. 신나는 마음에 면접을 보러갔다. 면접을 보러 간 대표님들은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한다. '신입은 할 줄 아는게 없어서 처음부터 다 다시 가르쳐야 한다. 야근이 많을테지만 그만큼 배우는 게 많을 거다. 어떻게 우리랑 같이 해보지 않겠니? 아, 연봉은 1800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미술학원이며, 대학교며, 포트폴리오 학원이며 거기에 넣은 시간과 돈이 얼만데... 1800이라니... 하지만, 주위 선배들이 자주 하던 말이 있다. 에이전시에서 실력쌓고, 인하우스가서 연봉 많이 올려 받아야 한다는 말. 그래, 그래도 난 아직 젊고 신입이니깐 열심히 배워서 나중에 멋진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기대하던 첫 출근날. 내 생각과는 다르게 너무 바빠서, 나에게 뭘 알려주는 사람도 제대로 없었다. 그냥 갑자기 파일을 던져주고 디자인을 해보라고 한다. 작지만 내가 맡은 첫 디자인 업무라는 생각에 최선을 다해서 디자인을 했다. 그렇게 일을 하다보니 첫 출근인데 다음날 새벽 3시 20분에 집에가는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그렇게 한달 내내 11시 이전에는 퇴근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한달 뒤 내 통장에는 137만원이 찍혀있었다. 세금을 뗀 내 한달의, 아니 고등학교 때부터 10년 이상 노력의 결실이었다. 허망했다.
(왜 이 짤이 저장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당시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나 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이 작은 디자인 회사에서 디자인을 제일 못한다. 사수, 선배들은 어떻게 저렇게 짧은 시간에 빠르게 그리고 퀄리티 높은 작업물들을 휙휙 만들어 내는지, 왜이렇게 나는 항상 부족한 건지 자책했다. 악이 받쳤다. 그래, 주말에 전시도 보러가고 틈틈히 강의도 듣고 실력을 쌓으면 내 디자인도, 처우도 더 좋아지겠지.
그렇게 참고 버티며 공부하고 실력을 쌓으며 디자인회사를 5년을 다녔다. 실력? 그래도 이젠 많이 나아진 것 같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은 많다. 예전에는 내 윗사람만 잘했는데, 이제는 내 밑으로 오는 친구들도 디자인을 너무 잘한다. 무엇보다 이젠 더 이상 디자인이 즐겁지가 않다. 고통스럽다. 일은 여전히 너무 많고, 매일 야근을 하는데 내 대우는 왜 항상 최저시급을 받는 편의점 알바보다 못한 걸까. 이게 과연 내 잘못일까? 10년을 넘게 노력. 노오력 하는데 디자인을 '못'한 내 잘못일까? 오늘도 9시 10시까지 야근을 하지만 디자인 시안이 잘 안나오면 실장님한테 가서 한소리 듣는다.
내가 했던 디자인 작업중에는, 말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알만한 글로벌 브랜드의 디자인 작업도 많은 편이다. 주위 친구들은 내가 한 디자인을 보고 '와'하고 감탄하곤 한다. 그럴때마다 때때로 잠깐씩 디자이너 부심에 빠지곤 했다. 그리고 그 성취감, 자부심때문에 더 열심히, 더 잘 하려고 야근을 했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그런 휴식없는, 보상없는 노력은 날 점차 지치게 만든다는 사실을.
한 친구는 한해 성과금으로 내 연봉의 3배가 넘는 금액을 한번에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현타가 온다. 쎄게 온다. 나도 충분히 그 친구못지 않게 노력한 것 같은데, 왜 난 이런 대우를 받으며 사는 걸까? 억울하다. 정말 너무 억울하다. 난 어제도 저녁 11시에 퇴근했는데... 과연 이렇게 앞으로 쭉 살면 내 인생도 피는 날이 오긴 할까? 아니. 앞으로 5년, 10년, 20년을 더 해도 나아지긴 할까? 점심 먹을 때 1000원, 2000원 더 비싼 메뉴에 고민하고 있는 내가 너무 싫었다. 진짜 비참하다. 친구들하고 술먹고 멋지게 한턱 계산도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뒤에서 쭈뼜대는 내가 너무 싫었다. 진짜 싫다.
근데, 이게 비단 나라는 디자이너 한명 만의 문제일까? 내가 디자인을 잘 못해서, 나만 디자인을 잘했으면 해결 될 문제일까? 물론 정말 잘하는 그 누군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문제일 것이다. 그들은 충분히 제대로된 대우를 받으며 회사를 다닐테니. 하지만 10명중 8~9명이 나와 같은 처지라면,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최근에 디자인 회사를 떠나 일반 회사의 디자이너 직책으로 들어갔다. 사실 말이 좋아 디자이너 직책이지 그냥 포토샵, 일러스트를 다루는 직장인, 오퍼레이터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다. 디자인 회사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정시 퇴근 덕에, 워라벨을 지키며 사람 대접 받으며 다니고 있다. 결국 선배들의 말이 맞긴 맞았다. 에이전시에서 배워서 인하우스에 들어가니 대우 받는다는 말. 하지만 시궁창같은 과거에 비해서 나아진 것이지 이제야 겨우 남들 사는 것처럼 사는 것 같다. 이게 맞는건가. 그럴꺼면 난 왜 굳이 돌아돌아 온걸까. 심지어 나만 운좋게 '탈출'했을 뿐, 여전히 대다수의 디자이너들은 과거의 나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일반 회사에 들어오고 나니 두가지 감정이 든다. 그렇게 디자인을 잘하고 싶어서 놓지 못하던 디자인을 이제 좀 놓고나니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행복하다. 더이상 끊임없는 시안 경쟁에 내몰리지 않아서 마음이 편안하다. 동시에 두렵다. 이 편안함에 한번 발들이면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때문에. 가스라이팅을 당한다는 게 이런 걸까? 10년 넘게 디자인에 집착하다보니, 그렇지 않는 삶을 사는게 죄스럽게 느껴진다.
솔직히 말하면, 난 아직도 여전히 디자인을 더 잘하고 싶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는 없다.
그래서 난 디자이너가 아닌 오퍼레이터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글을 보고 한번쯤 생각을 해봤으면 한다.
꼭 '디자이너'가 아니라도 괜찮다는 생각. 많은 디자인을 하는 친구들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저 지시 받은대로 작업하는 '오퍼레이터'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한다면 그거 나름대로 괜찮은 것 아닐까? 그리고 사실 디자이너라고 하지만, 어차피 클라이언트의 방향에 맞게 디자인을 하는데, 이 역시도 완전한 '디자이너'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여러분에게 작은 하나의 선례가 되어, 이래도 괜찮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디자이너는 최고의 디자인 실력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사회의 분위기 역시 사회가 디자이너에게 가하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이 말도 안되는 기형적인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모두가 거는 사회적 최면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런걸 감안하고서라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 좋은 작업물들을 내고 있는 디자이너들을 나는 존경하고 높게 평가한다. 내가 끝끝내 가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걸 이루고 있는 열정있고 대단한 사람들이니깐. 나를 단순히 경쟁에서 진 루저라고 생각해도 좋다. 결국 이 시스템을 버텨내지 못하고, 편한(?) 길을 택했으니. 그렇지만 상위 10프로만 잘 되고 나머지 90프로는 소위 갈려나가는 상관없는 이 시스템은 잘못된 것 아닐까?
여러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는 비단 디자이너에게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음악을 하는 친구들, 체육을 하는 친구들, 기자, 작가, 모델, 배우, 간호사, 요리사 등 다방면에서 비슷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사회는 1등만 기억하기에, 1등을 하지 못하면 잊혀지는 나머지 1등이 아닌 사람들. 하지만 그들도 충분히 그 자체로 괜찮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좀 더 정갈하게 이 글을 쓰고 싶었는데, 글 재주가 부족해서 이정도로밖에 마무리 짓지 못할 것 같다.
오랜 시간 고민하던 주제라서 여러분들의 의견 또한 궁금합니다. 많은 의견을 나누고 생각을 넓히고 싶습니다. 댓글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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